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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사람을 찾아서 | 임동락 | 2025-02-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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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을 찾아서 본문: 눅 4:22~30 예수님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도 받으셨지만 배척도 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위협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을 찾아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고향 나사렛 지역에 있는 회당에서 이사야 61:1-2절 말씀을
봉독하시고, 그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설교를 하십니다. 설교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세상에 선포하는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자유는 정치적 속박과 경제적 빈곤과 육체적 질병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사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또한 이 자유는 우리의 짓눌린
상황으로부터의 회복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21절에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설교를 마치셨을 때 청중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22절에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6:2절을 보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혜와 권능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메시야, 즉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되어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청중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때에 나타난 1차적인 반응은 그의 가르침에 따른 그 지혜와 권세를 볼 때에 예수님을 메시야
반열에 올려놓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중들의 반응이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22절 하반절을 보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또 막6:3절에는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말합니다. 출신을 말합니다. 사회적 지위를 말합니다. 그 가르침을 들을 때에 메시야만이 행할
수 있는 지혜와 권세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정하고 고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족보와 출신과 지위가 논하여졌을 때는 도리어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3절 말씀 자막으로 다같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예수님은 자기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자신을 향하여 의문을 제기하실 때 속담을 하나
인용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고칠 때 환자보다 의사가 더 아프면 사람들이 의사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하십니다. 환자를 고칠 생각보다는 의사 자신의 건강부터 챙기라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사실 이 말은 의사를 살짝 무시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의사의 사명은 환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의사는 자신이 아플지라도
환자를 고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의사 자신의 병은 다른 의사가 고쳐줄 것입니다. 만약 의사를 향해 네 병부터 고치라고 하는 말이 옳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어느 곳부터 먼저 전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고향에서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향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먼저 들어야 하고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얕잡아보고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국가와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전도자와 주의 종이 고향에서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예도 있습니다. 그 분의 과거와 성장배경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분을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사실을 알면 반응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고향에서도 보아야만이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24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은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기대를 거절합니다. 인간적으로 가까운 것 때문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기적을 내가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만나지 못하고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 가운데 함께하시고 만나 주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찾으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주님 앞에 드려지는, 귀한 지체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5-27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고향 나사렛에서 당하는 불신과 배척은, 자신에게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항상 있어온 일이라는
것을 두 가지 증거를 통하여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25-26절을
보면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보냄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27절에 선지자 엘리사 때에도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보냄을 받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뿐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사렙다와 시돈은 이방인의 땅입니다. 그리고 과부와 나아만이라는 이방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사람들이었지요. 하나님은 당시에 모든 과부와 나병환자에게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구제하고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땅이면서도 배척을 받는 사람들인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선지자를 보냄으로 그들을 구제하고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흉년에 생존해야 할 사람, 질병을 치료받아야 할 사람이 수없이 많았지만 딱 한 사람씩만 생존하고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씀이 전달될 때 말씀을 듣기보다는, 전달하는 사람을 향해 트집을 잡으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입니다. 전달자를 잘 모르더라도 전하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동네가 만들어질 때 산을 깍아 언덕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언덕으로 끌고 가
밀어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이처럼 반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로 멀쩡하게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다른 믿음의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모두가 세상적인 기준인 인간의 상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지식과 상식의 눈을 넘어서서 성령의 지식과 능력으로 그분을 보아야 하고 깨달아 알아야 할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누구도 예수를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계란에 유정란과 무정란이 있는 것처럼 사람도 유정란 같은 사람과 무정란 같은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유정란 같은 사람에게는 믿음의 씨앗, 즉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 구별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웃느냐 웃지 않느냐, 둘째, 감사하느냐
감사하지 않느냐입니다.셋째, 감동하느냐 감동하지 않느냐입니다. 웃지 않는 사람은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이 음식을 대접하면 “오! 환상적인 맛입니다.”라고 감사하면 대접하는 사람이 얼마나 기쁠 까요. 좋은 곳에 초대를 받았을 땐 “여기
정말 쥑이네”라며 감동하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깨달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처럼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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