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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임동락 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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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앞에              본문 11:1~7

시편 11편은 표제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인데, 인도자가 선창하면 회중이 한 구절씩 따라 부르는 방식을 말합니다. 사노라면 어떤 큰 위기나 어려움이 닥치죠.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요? 일반적으로 대항해서 싸우거나 아니면 피하여 도망칩니다. 대부분은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어려움을 당하고 그 후에는 위기 상황 속에서 허우적거립니다. 또한 어려움은 한 가지씩 오지 않고 떼로 몰려옵니다. 수습하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한꺼번에 닥친다면 그야말로 정신을 못 차릴 것입니다. 가족들과 나의 안정을 위해 어디론가 피하면 좋겠는데, 의지할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저 막막하기만 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까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믿고 기다리는 동안에 더 악화되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극도로 불안하고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서로 통하는 것이 있어서 위기 상황 때 서로 도와주고 불의를 눈감아 주기도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만 믿고 있다가 혼자 맨몸으로 위기 앞에 서야 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해서 어떻게 했나요?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그것이 안전한 길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하나님께 피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먼 곳에 있는 당신의 산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사울 왕이 잡으러 갈 수 없는 더 먼 곳으로 도망치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윗이 너무나도 위험하고 대책 없이 도망치고 있는 것 같으니 새처럼 더 멀리 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해결하려면 새처럼 멀리멀리 도망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루하루를 도망치게 하셨습니다. 미래에 대한 대책도 없고, 언제 사울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보장도 없이 계속 아슬아슬하게 쫓겨 다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께로 피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을까요? 다윗은 하나님만을 붙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일체 받을 수가 없었고, 사울이 죽기 전까지 결코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셔서 왕으로 삼겠다고 하셨으니 어떻게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씩이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를 복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반드시 복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차 버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고생한 것입니다. 환난과 어려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결국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셨다. ( 8: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서 오늘 나에게도 적용되고 나에게도 세미한 음성으로 길을 인도해 주시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세상의 복은 하나님이 한 번 불면 다 날아가지만( 1:9), 하나님의 복은 나의 생명을 끝까지 지켜 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어떤 위기에 처한 것은 절대로 나쁜 상황이 아닙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복의 첫 걸음인 살아 있는 말씀을 체험하고 가질 수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더라도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도우시는 힘으로 위기를 피해 가고 있었는데, 그만 악인에게 딱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악한 자가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여서 다윗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피한다고 피했는데 악인에게 들켜서 꼼짝없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악한 자가 활을 겨냥하기만 할 뿐 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있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눈을 흐리게 하셔서 갑자기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팔을 마비시켜서 활시위를 당기지 못하도록 하시기도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의 팔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고 계신 것입니다. 예로 다니엘이 사자 굴에 떨어졌을 때 어떤 일이 있었지요? 사자들은 이상하게도 접착제로 입을 붙인 것처럼 입이 벌어지지 않아서 다니엘을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 천사들이 사자들의 입을 전부 잡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정말 스릴 만점의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에서 터가 무너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적에게 쫓기고 쫓기다 절벽 앞까지 몰린 것입니다. 다윗은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하나요? 의인이 무슨 소용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차라리 다 포기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악한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뭐라고 속삭였지요? 뛰어내리라고 속삭였습니다. 우리는 절대 그런 말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절벽 끝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시련 중에도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는 복을 받았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안식처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인 피난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위로를 받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4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먼 곳에 계시지 않고 성전'에 계신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또 내 몸이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과 함께 하여 주십니다. 무언가 정상적인 대결이 아니라 술수를 통해 시인을 쏘려고 합니다. 이런 악인의 술책을 알았으니 이제 빨리 피할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언제 활을 당긴 손을 놓을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안하고 두렵고 촌각을 다투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주변 지인들은 난리입니다. “빨리 네 산으로 도망하라.” 피하거나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했을 것입니다. 주변은 부산합니다. 피할 산을 찾고, 도망할 길을 찾고, 지금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시인은 곧 당할 수도 있지만, 그 틈에도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시인이라고 안 두려웠겠습니까? 두려움은 사람의 시야가 좁아지게 만듭니다. 보통 사람은 두려움에 휩싸이면 좁은 시야로 이리저리 살 길을 찾아 헤맵니다. 그렇게 되면 보통 더 악수를 두기 마련이지만, 알면서도 막상 닥치면, 인간의 역량으로는 두려움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갖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피하였다.” 하나님께 피하였기에,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급박하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언어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일제침략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로 돌아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자기 일신의 안위를 위해 돌아선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연약하고 부패한 이 조선이 독립을 한 들 무슨 의미가 있냐며, 무엇이 의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터가 바로 선 지금에 와서는 친일을 한 사람과 독립운동가가 명확하게 구분되지만, 혼란의 시기에는 무엇이 의이고 누가 의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의인은 터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터가 이 세상입니까? 혹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인가요? 우리의 터는 하나님입니다. 이 터는 변하지 않고 한결같고 신뢰할 만큼 견고하기에, 이 터 위에 의인도 견고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항해하는 배들과 사막이나 광야를 지나가는 이들이 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그 방향을 놓치지 않는 것처럼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야 함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믿음의 사람들이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의 시선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영적인 영점을 다시금 잡는 회복의 시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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