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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신 예수님 임동락 202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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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하신 예수님                   1:7~11

유대인 격언에 “남이 서있을 때 앉아 있지 말고남이 울고 있을 때 웃지 마라또 남이 배고파할 때 먹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이 격언이 의미하는 바는 “공감대를 깨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9절 말씀 다같이 봅니다. 시작!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아멘!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면 먼저 죄부터 씻어야 합니다죄를 씻으려면 성전에 들어가 속죄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만든 제도가 이방인도 죄를 씻을 수 있도록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그러니까 물세례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행하던 것이었습니다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 물세례를 유대인들에게 요구한 것입니다죄인이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어떻게 된 일일까요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이방인들과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예수님의 일생은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삶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시길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의 복음 전파 안에는 특별한 의식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입니다. 4절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의 세례의 목적,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앞으로 세례를 베푸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고백합니다. 7절입니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요한은 자신이 베풀고 있는 세례는 온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8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는 죄를 사할 능력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온전한 세례의 필요성을 준비하기 위한 선행 과정으로서 물세례를 베풀고 있을 뿐이라 합니다. 이제 오실 이는 온전한 세례를 베푸시기에 그의 신발끈조차 풀 수 없는 사람이라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세례와는 다른 온전한 세례, 성령 세례는 무엇이기에 온전한 세례라 할까요? 온전한 세례 죄 사함의 능력 온전한 세례, 성령 세례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이 베풀었던 물세례는 원래 있었던 의식입니다. 이방인이 유대교에 입문할 때 행하는 종교적 의식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봐왔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이 바울이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요한의 세례, 물 세례 밖에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이죠. 쉽게 말하면 세례는 의식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이가 누구신 지에 그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물세례, 즉 회개의 세례를 통해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죄를 씻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죄를 사해 달라는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죠. 그러나 회개를 위한 물세례에는 죄가 있다는 것, 죄 사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 죄 사함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면 물세례가 의미가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마치 물세례는 율법, 십계명과 같습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받고 묵상하고, 지킴을 통해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죄 사함이 필요하고 나를 죄로부터 더욱 정결하게 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물세례는 그런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물세례를 통해서 정결하게 살 것을 스스로 다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정결하게 살아가고 죄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10절입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성령의 임재, 온전한 세례에는 성령의 임재가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장면은 여느 물세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재하십니다. 원어로는 갈라지다 : 찢어버리다. 새롭게 열다. 자신이 죄인인 것밖에 깨달을 수 없는 불완전한 물세례, 구원할 수 없는 온전하지 않은 세례의 시대를 찢고, 새로운 성령의 세례를 여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성령의 온유함, 성령의 통치를 부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계실 때 비로소 세례의 온전함이 드러납니다. 물세례에는 없는 온전한 세례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 하나님만이 가르쳐 주시는 특별한 지식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임재가 있는 세례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28:19~20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령 세례가 행해질 때만이 죄 사함 받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는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서 세례는 곧 구원을 위한 과정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물세례를 받으시며, 모든 인간은 회개와 구원이 필요함을 알립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정결해져야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기에 세상 그 어떤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하여도 모든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온전한 세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사람의 대표로서의 모습을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례는 물세례의 외적인 모습을 띠나, 우리가 그 가운데서 보고 느끼고 경험해야 하는 것은 온전한 세례, 성령 세례입니다. 물세례로는 구원 받을 수 없던 우리의 삶에 성령께서 함께하사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내가 세례를 받을 때에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세례에 참여하는 교우로서 세례식에 함께할 때에도 성령의 임재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예전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냥 물 세례였나 봐요. 저 다시 성령세례를 받고 싶어요라고 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회개가 늦어도, 그 깨달음이 세례 이후의 신앙 생활에서 있었다고 할지라도 세례는 유효합니다. 믿음과 성령의 임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합니다. 세상에 아들을 미워하는 아버지는 정상이 아니죠. 아버지는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양육을 책임지고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대학교 이상까지 교육을 돕습니다. 아들이 장성해서 성인이 되었을지라도 항상 염려하고 무엇이든지주고 싶어 합니다. 이게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아들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죄악으로 인해 멸망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보고 최후의 수단으로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는 죄가 전혀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겸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힘이 납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씀을 듣는 것이죠. 예수님처럼 겸손해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저출산고령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저세례고령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출산 만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세례 받을 성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교회, 주님께서 보실 때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아들과 같은 겸손한 삶, 그런 교회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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