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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 임동락 | 2026-03-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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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엡 2:1~10 종교의 목적은 ‘선’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우리는 단지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죽었던 존재이고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었습니다. 즉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930세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살았다고 하나 죽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이고 우리에게도 죽음이 들어 왔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생명이 필요하고 죽었기 때문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 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1절 말씀이죠.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성경은 우리가 '죽은' 상태, 즉 영적으로 시체였다고 진단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스스로 자신을 살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실수가 아니라 '허물'(어디에서 떨어져 나간 것)과 '죄'(과녁에서 벗어난 것), 즉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전적 타락' 교리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세상 풍조, 마귀,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2-3절). 이러한 영적 사망 선고를 받은 우리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응급실 환자 살려놓으면 다시 죽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사건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장 절망적인 우리의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무조건적 긍휼과 풍성한 사랑이 우리를 살려내셨는지, 그 구원의 위대한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현실을 잠시 상상해 보자면,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거대한 시체 안치실과 같았습니다. 그 안치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숨을 쉬려 노력했지만, 이미 죽었기에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팔을 휘저으며 일어나 보려고 애를 썼지만, 근육이 마비되어 꿈쩍도 하지 못합니다. 그 시체들은 바로 1절에 기록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영적 시체들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걷고, 말하고, 먹고 마십니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착각하며, 죽은 채로 2절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세속주의),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며(마귀의 지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자기 중심적 삶)" (2-3절).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허물과 죄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엉뚱한 것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 세상풍조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죠. 여기에는 거대한 배후가 있는데,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입니다. 사탄은 고소자, 참소자로 방송미디어와 SNS등을 말합니다. 어디를 가도 온통 핸드폰에 매여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모든 문이 굳게 닫혔으며, 진노의 심판만이 남은 그 순간, 성경은 인류 구속사의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두 단어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But God)!입니다. 4절 같이 보시죠.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여기서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의 절망적인 역사를 송두리째 뒤엎는, 개혁주의 구원론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진노를 받을 자격밖에 없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며, 은혜의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살리셨을까요? 우리의 공로나 자격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동기를 명확히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함'입니다. 원어로 '플루토스'(Ploutos)는 '부요함', '재산의 풍성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고 풍성한 창고와 같습니다. 긍휼(Eleos)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과 비참함 속에 있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비참한 시체 상태를 보시고, 심판 대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가치 때문에 생긴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가치 없을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롬 5:8) 보여주신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죽어 마땅한데, 하나님은 자신의 풍성한 긍휼과 큰 사랑 때문에 스스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바로 이점을 강조하는 말씀이 8절과 9절입니다. 다같이 믿음으로 읽습니다. 시작!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아멘! 구원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이란 본래 값없이 받는 것이지, 선물을 받으면서 돈 내는 사람은 없지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그 선물은 받은 사람의 것이 됩니다. 바울은 5절의 가장 중요한 구절을 괄호 안에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은혜'(Charis)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은 우리의 구원이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로 말미암았음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선물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감사해야 할 이유이며, 우리의 모든 자랑이 주님께로 향해야 할 이유입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 무엇인지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나 도덕적 선행이 아니라, 오직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지만,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영적 도전을 던져줍니다. 첫째, '은혜의 자리'에 굳건히 서십시오. 우리는 결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능력이나 감정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긍휼 위에 세워져 있음을 매일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부활한 자'답게 사십시오. 우리가 더 이상 세상 풍조와 마귀의 영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새로운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물고기가 아닙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이 세속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이야말로 긍휼을 입은 자가 마땅히 보여야 할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번 한 주, 아니 우리의 남은 삶 전체를 통해, 우리를 살리신 그 긍휼의 풍성함을 기억하며, 감격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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